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문단 편집) == 개요 == >Un terrorista no es solamente alguien con un arma de fuego o una bomba, sino también alguien que difunde ideas contrarias a la civilización occidental y cristiana. >'''테러리스트는 총이나 폭탄을 든 사람일 뿐만 아니라 서구와 기독교 문명에 반하는 사상을 퍼뜨리는 사람이기도 하다.''' >----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1977년에 남긴 말이며, 1978년 1월 4일자 런던 [[타임즈]]에 실렸다. [[아르헨티나]]의 제41대 [[아르헨티나 대통령|대통령]]이자 [[독재자]], [[학살자]]. '남미의 나치'로 불릴 정도로 억압적인 군사정권 통치와 경제 정책 대실패로 인한 아르헨티나의 경제 몰락으로 인하여 전세계적인 비난을 받는 독재자였다. 그의 집권 5년 동안 공식적인 집계로만 1만 5천여명, 현재 아르헨티나 독재 피해를 조사하는 단체의 추정으로는 3만 명~4만 5천여명에 이르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납치, 고문, 살인 등으로 사망 또는 '실종'되었다. 현재까지도 피해자들의 시신은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외곽의 그랑부르 공원에서는 400여 구의 유골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또한 비델라는 아르헨티나의 경제마저 몰락시켰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악평을 받는다. 이 점이 동시대 남미의 또 다른 군사독재자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피노체트 말고도 다른 군사독재자들, 대표적으로 박정희나 피노체트, 수하르토, 폴 카가메 등은 독재를 했지만 국가를 발전시켜 독재와 인권탄압에도 불구하고 찬양, 지지하는 계층이 존재하나, 이쪽은 [[김씨 왕조|독재를 하면서, 경제까지 말아먹었기에]] 욕을 먹는다. 사실 아르헨티나는 1929년에 있던 미국발 대공황 이전까지 남미를 비롯해 세계에서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부국에 남미의 강대국이었지만[* 엄마 찾아 삼만리 스토리가 애초에 왜 나왔는지 생각해 보면 얼마나 부유했는지 알 수 있다. 간단히 말해 19세기 아르헨티나가 자기를 식민지배했던 스페인 등 유럽 열강들보다 잘 살았다.] 몇 번의 경제위기를 겪고 그 위상이 추락했는데, 그나마 다른 경제문제에서는 몰라도 어떻게든 빈민율만은 억제하며 나라 꼴은 유지했는데 비델라 정권은 아르헨티나의 그나마 남은 마지막 자존심인 빈민율은 물론 외채까지도 극대화시켰고,[* 실제로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징 빈민 증가율이 높았던 시기가 비델라 집권기간이었다.] 그의 잘못된 실정으로 국가 경제 기반을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따라서 아르헨티나에서 비델라의 폭정으로 인한 후유증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다른 독재자들의 경우 공과를 구별해서 논하는 경우가 잦으나, 비델라의 경우 공이 사실상 없으며 과만 극단적으로 큰 사례이며 죽을 때까지 본인의 악행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없었기에 [[아이티]]의 [[프랑수아 뒤발리에]]와 더불어 아메리카 최악의 독재자로 평가받으며,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반공 성향 독재자[* 후술하겠지만 비델라는 반공 성향일지언정 완전한 친서방은 아니었다. 오히려 [[블라디미르 푸틴]]과 더 유사하다.] 중 하나이자 [[네 윈]]과 더불어 최악의 군사정권 독재자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 결국 이런 학정과 경제 파탄으로 인하여 퇴진 이후 죽을 때까지 온갖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80대 후반의 나이로 감옥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